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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

Brian Eno - Top Boy (Netflix, 2023)

 

영국 전자음악가 Brian Eno가 작곡한 드라마 Top Boy의 OST.

 

이번 앨범은 마지막 다섯 번째 시리즈의 공개를 앞둔 드라마 Top Boy (2011-2023) 전체의 음악을 포함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그 정점을 향해, 결국 브렉시트에 이르는 기간 동안 영국에서 제작한 영화나 드라마를 시청하다 보면, 전혀 다른 시대적 상황과 정치적 배경을 지니고 있음에도, 과거 대륙 반환을 앞둔 홍콩의 누아르들이 떠오르곤 한다. 막연한 미래가 전하는 불안과 일상화된 절망이 만들어 낸 정서적 분위기는 서로 무척 닮았으며, 영상은 물론 그 안에 담긴 음악 또한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영국 드라마 중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시리즈들 중 하나로, 특히 그 속에 담긴 브라이언의 음악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고유한 극 중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극히 일부만 공식 공개되어서 무척 아쉬웠지만, 시리즈의 결말에 맞춰 음악 전체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반가울 따름이다. 

 

음악은 일렉트리닉에 기반하고 있지만, 익숙한 어쿠스틱 사운드의 활용에도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와 같은 절충적인 작법은 극이 다루는 시대적 상황이 개인의 행동과 감정에 끼치는 영향에 관한 음악가의 사색적 고찰에서 비롯된 선택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갖게 된다. 전통 음악과 전자 음악의 교차점에서 다뤄지는 다양한 접근은 구성이나 진행 형식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데, 시퀀서의 흐름을 기존의 익숙한 코드 진행 양식에 기반해 연출하는가 하는 모습이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와 같은 두 가지 상이한 양식의 접점을 하나의 단일한 표현으로 획일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경계 또한 무수히 변화하는가 하면 때로는 다양하게 점멸하며, 그 구분을 무효화하거나 혼란스럽게 다룬다는 것이다. 이 또한 드라마가 담고 있는 상황을 자신의 음악과 일치시키기 위한 음악적 결론이 아닐까 짐작하게 되며, 한편에서는 이와 같은 접근 자체가 풍부한 음악적 상상력을 개방하는 자극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일렉트로닉의 사운드는 정교한 큐레이팅을 통해, 각각의 음향이 지닌 고유한 특징을 명확히 하는데, 모듈레이션의 변화로 연출하는 미묘한 떨림이나 변화는 물론, 그 자체가 품고 있는 독특한 노이즈 텍스쳐 등은, 주변 음향과의 관계없이도 그 자체로 명료한 상징성을 품으며, 음악적 플로우를 이끌어가는 강한 힘을 지니기도 한다. 정교한 시퀀싱과 공간 표현이 전하는 독특한 긴장감은, 때로는 등장인물의 움직임 속에 담긴 정서와 감정을 하나의 소리로 응집한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여, 사운드 디자인과 구성의 섬세함을 엿볼 수 있다. 복잡한 구성을 피하는 대신 사운드 하나가 지닌 역할을 강조하는 만큼, 레이어 하나하나에 깃든 정교한 소리는 그 자체로 강한 힘을 지니기도 한다. 브라이언의 음악은 드라마의 수많은 장면 속에 기존의 통념과는 다른 표현을 통해 개입하면서도, 나름의 절묘한 접합점을 확인하며, 극이 지닌 복합적인 정서와 긴장을 응축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어쩌면 이와 같은 개입은 극 자체가 지닌 정서적 혼란스러움과 방황에 알맞은 가장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기도 하며, 때로는 드라마의 매 순간을 소리로 담아낸 묘사적 표현이라는 생각도 들게 하는, 응축적이면서도 절제된 음악적 전달을 보여준다. 불량한 청년들의 행동에 기성세대 브라이언이 보이는 음악적 반응이 전혀 꼰대스럽지 않다는 점이, 이번 앨범이 전하는 가장 놀라운 대목이 아닐까 싶다.

 

전통적인 영상 음악의 언어와는 다른 절충적 지점에서 화면의 내용에 개입하면서도, 해당 장면의 정서적 긴장과 내용을 정확하게 집약하는 듯한 표현을 담고 있으며, 음악 그 자체만으로도 풍부한 영감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인상적인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시리즈의 첫 공개와 함께 시작한 브라이언의 음악적 여정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시간의 변화 속에서도 일관된 분위기를 지속하며, 드라마에 담긴 정서와 함께 이어지는 음악가의 호흡을 감상하는 듯하다. 지금까지 작곡가가 남긴 많은 영상 관련 음악들 중, 개인적으로는 가장 깊은 인상과 영감을 주고 있으며, 10년 넘는 오랜 기다림을 충분히 보상해 주는 앨범이다.

 

 

2023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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