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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

Marek Tomczyk - Zbigniew Preisner's Music (self-released, 2023)

 

폴란드 기타리스트 Marek Tomczyk의 Zbigniew Preisner 음악 연주 앨범.

 

앨범의 주요 테마를 이루는 쓰비그니에프 쁘라이스네르는 폴란드의 영화음악 작곡가다. 1990년대, 페레스트로이카라는 새로운 개념이 소개된 이후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는 가속화되고 동유럽의 탈 사회주의화가 이어지면서, 이데올로기가 몰락하고 이념이 해체된 진공의 자리를 대신할 그 무엇인가를 필요하게 되었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사회 또한 진공을 허락하지 않기라도 하듯,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재즈와 영화가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영화의 경우 그동안 주류로 인식했던 할리우드를 넘어 유럽 예술 작품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면서, Andrei Tarkovsky의 영화 3편이 동시에 개봉하는 것을 넘어 매진까지 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현상이 단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폴란드 감독 Krzysztof Kieslowski의 작품들이 연이어 전 세계적으로 많은 관심을 끌었던 것을 보며 유추할 수 있는데, 그의 고전적인 70년대의 작품 외에도 Bleu, Blanc, Rouge 삼부작으로 이어지는 Trois Couleurs (1993-94) 외에도, 성서의 10계를 모티브로 한 10부작 TV 시리즈 Dekalog (1989)도 큰 주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치 Roman Polanski의 영화에 Krzysztof Komeda의 음악이 함께했던 것처럼,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영화 속에는 늘 쁘라이스네르의 곡이 함께하고 있었다. 1980년대부터 시작한 둘의 인연은 단순히 감독과 음악가의 통상적 관계를 넘어, 각본 단계에서부터 협업을 진행하며 편집 과정에도 참여하는 긴밀함을 유지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폴란스키와 코메다의 인연이 그러했듯, 감독과 음악가의 인연은 1996년 거장의 사망으로 끝을 맺게 된다.

 

이번 앨범은 키에슬로프스키와의 인연 속에서 탄생한 음악 외에도 Hector Babenco, Louis Malle, John Irvin, Loukia Rikaki 등이 연출한, 1990년대의 유럽 예술 영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제작 속에 포함된 쁘라이스네르의 곡을 다루고 있다. 연주는 마레크 자신의 어쿠스틱 및 전자 기타를 비롯해, 피아노 Dominik Wania, 색소폰 Janusz Witko, 트럼펫 Tomasz Nowak, 베이스 Tomasz Kupiec, 드럼 Wojtek Fedkowicz 등, 세대를 아우르면서도 현재 폴란드에서 다양한 조합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뮤지션들로 이루어졌다.

 

마레크 본인이 90년대 당시의 혼란스러운 시대적 분위기를 직접 경험했던 탓인지, 원곡에 대한 비교적 충실한 재현과 더불어, 그 안에 담긴 미묘한 정서적 흔적까지 다루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테마 구성에서의 엄밀함과 정교함을 통해 원곡의 오리지널리티를 비교적 선명하게 보여주면서, 그 진행에서는 이를 연장해 재즈의 모티브를 활용해 확장항 수 있는 공간을 재구성하여 자연스러운 일련의 흐름을 완성한다. 고전적 양식을 재현한 듯한 구성의 엄밀함과 재즈의 전통적인 스텐스에 충실하면서도, 투명하고 선명한 음선의 연주를 조합하여, 마치 악기와 악기 사이의 거리를 넓힌 듯한 여유로운 공간 활용이 눈에 띄기도 한다. 색소폰이나 트럼펫에 딜레이와도 같은 긴 서스테인이 걸쳐지는 리버브의 에어리 한 공간은, 비교적 드라이하게 재현하는 기타나 피아노와 대비를 이루며, 마치 서로를 관조적인 거리에서 바라보며 대응하는 듯한 공간 연출 방식 등은, 앨범 전체에 흐르는 고유한 정서적 분위기를 더욱 적막하고 공허한 톤으로 채색하기도 한다. 이는 영화 속 원곡의 시대적 정서를 연주자들의 공간 속에서 재현한 방식처럼 보이기도 하며, 이러한 분위기는 개별 연주에도 반영되어, 솔로 또한 절제된 집약을 통해 전개하는 듯한 정갈함을 담아내기도 한다. 개별 연주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아도 될 만큼 곡의 구성에 적합한 합목적성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안정적인 균형과 조화를 바탕으로 원곡의 정서적 분위기를 자신들의 공간에서 재현하는 일관성을 담고 있다. 마지막 트랙은 이 모든 정서를 집약하는 듯한 마레크 자신의 오리지널로 앨범을 마무리한다.

 

해당 영화의 국내 개봉 당시 의외의 큰 반향 덕분에 OST 또한 계약 발매 혹은 수입되기도 했었기에, 이를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내일은 없을 것만 같아 오직 오늘만 살았던 자신의 흑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세기말과 교차하면서, 낭만적 절망 혹은 비극적 희망이 더욱 부풀려졌던, 그 시절의 시대 정서를 담담하게 재현하면서도, 당시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세대에게는 그저 편안한 재즈 연주로 쉽게 들을 수 있는 연주가 담긴 앨범이다. 클래식과 재즈에 녹아든 폴란드 음악 특유의 낭만적인 서사도 함께 경험할 수 있다.

 

 

2023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