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ound

Richard Skelton - Selenodesy (Phantom Limb, 2023)

 

영국 전자음악가 겸 작곡가 Richard Skelton의 앨범.

 

리처드는 음악가이면서 영화와 매체를 아우르는 여러 미디어에 걸쳐 창작 활동을 펼치는 예술가이며, 작가인 동시에 고고학, 인류학, 지질학 등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과 협력을 이어오는 학자이기도 하다. 레이블을 직접 운영하며 야생 풍경과 관련한 음악적 견해를 조직하기도 했으며, 출판사를 설립해 생태 시학에 관한 작업을 큐레이팅하는 것으로도 알려졌다. 환경이라는 단어 대신 풍경(landscape)이라는 용어를 개념화하여, 자신의 다양한 작업에 활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용어는 장소성과 더불어 정서적 공감을 함께 포착하는 듯하며, 리처드의 음악이 단순한 묘사적 표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가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 계기가 2004년 아내의 사망 이후 비극을 받아들이는 자신만의 방식이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리처드가 말하는 풍경이라는 말에는 단어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는 듯하다.

 

최근 리처드의 작업 중에 미디어 활동과 관련한 시각적 형상화를 다룬 음악도 포함하고 있지만, 2000년대 말부터 그는 자연 풍경에 뿌리를 둔 음악을 주로 선보였으며, 사막, 야생, 지질학적 발견 등과 같은 테마들을 통해 그 표현을 구체화하기도 했다. 보존된 풍경에 대한 묘사적 표현을 통해 경외감을 드러내는가 하면, 인간에 의해 황폐해져 버리진 풍경 속에서도 복원에 대한 열망을 나타내는 등, 주로 땅이나 대지 등과 같은 대상이 지닌 텍스쳐나 상징적 요소를 형상화하는 음악적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지질학이나 인류학 등에 대한 리처드의 학문적 관심과 관련이 있으며, 음악을 통해 형상화하는 사고의 총체성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번 앨범이 천문학적인 내용을 주제로 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리처드는 2017년 Kielder 천문대 근처 시골로 작업실을 옮겼다고 전하는데, 빛 공해가 없는 밤하늘의 풍경을 마주하며 새로운 테마로 작업을 이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리처드는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이른 새벽”에 주로 작업했으며 “불면증과 별 관측을 통해 얻은 안도감”을 기록했다고 이야기한다. 기존 작업과 비교했을 때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일렉트로닉이 차지하는 공간의 비중이 절대적이라는 점이다. 초기부터 리처드를 특징짓는 스트링 사운드는 여전히 등장하지만, 오실레이팅 한 음향과 복합적인 레이어링을 이루며, 마치 우주 공간에서 겹겹이 포착된 수많은 별들의 세계를 관찰하는 듯한 시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전히 익숙한, 스트링이나 브라스 계열의 소스를 활용하면서도, 신서사이저나 전자 장치를 통해서 형상화할 수 있는 독특한 펄스와 사운드를 유기적으로 조합하여 광활한 우주를 형상화하는 한편, 개별 소스의 엔벌로프나 텍스쳐의 변화를 동반하는 다양한 웨이브의 플로우를 중첩하여, 웅장한 움직임을 포착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도 리처드 특유의 다양한 텍스쳐의 개입이 눈에 띄는데, 개별 소스의 변화를 연출하는 요소로 활용하는 것은 물론, 서로 다른 유형의 질감을 대질시키고 그 균형의 이동을 통해 고유한 흐름을 유도하며, 미니멀한 플로우 속에서도 세밀한 역동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강한 금속성 질감을 지닌 날카로운 사운드는 독특한 묘사적 표현을 완성하는데, 듣는 입장에서는 가상적이면서도 묵시론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상상하게 만드는 효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와 같은 천문학적 풍경에 대한 표현이, 흔히 북미 스타일의 스페이스 앰비언트와는 확연한 차별점을 지닌다는 점으로, 우주를 단순히 신비한 대상으로 묘사하는 방식과 다른,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등치시킨다는 사실이다. 물론 Sci-Fi나 기존 앰비언트의 작법에서 통상적으로 활용했던 상징적 요소들을 도입하기도 했지만, 보편적 공감을 위한 활용이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리처드의 고유한 관점이 우위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천문학적 풍경이라는 독특한 테마를 배제하고, 단순한 앰비언트 음악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앨범은 공포, 신비, 경외감, 두려움 등 다양한 정서적 감정을 풍부하게 다루고 있다. 때로는 정적인 흐름을 통해 안정적 균형을 드러내는가 하면, 어둠 속 고립감을 극대화하여 다크 앰비언트 특유의 긴장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만큼 우주는 리처드에게 변화무쌍하면서도 낯선 풍경일 수도 있으며, 눈으로 본다고 해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을 보여주는 듯하다. 별을 볼 수 있는 일상조차 잃어버린 우리에게는 부러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2023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