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ound

Ryuichi Sakamoto - 12 (Milan, 2023)

 

일본 음악가 Ryuichi Sakamoto의 정규 솔로 앨범.

 

류이치는 “큰 수술을 마치고 마침내 ‘집에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신시사이저에 손을 뻗는 나를 발견했다. 뭔가를 작곡하겠다는 마음보다 그저 소리에 몸을 씻고 싶었다”라고 밝히며 “당분간 이런 ‘일기’를 계속 쓸 것 같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짧은 문장들은 이번 앨범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으며, 여기에 담긴 곡들은, 2014년 첫 진단에 이은 2021년 초 두 번째 암 발병 이후부터 이어진 투병의 힘겨운 기록 중 일부로, 그의 생일인 오늘 1월 17일에 공개했다.

 

1952년생인 류이치는 토쿄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했고 민속 및 전자음악 관련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0년대 중반 작곡가로 활동하며 여러 장르에 걸쳐 당시 일본의 유명 뮤지션들과 작업했고, 1970년대 말에는 3인조 그룹 Yellow Magic Orchestra의 멤버로 활약하며 명성을 쌓게 된다. 1980년대부터 영화에도 관심을 보이며 Merry Christmas, Mr. Lawrence (1983)에 David Bowie와 함께 출연하는가 하면 OST를 작업으로도 큰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후 The Last Emperor (1987)의 영화 음악으로 아카데미와 그래미를 동시에 수상하며 세계적인 반열의 음악가로 성장하게 된다. 그의 음악은 클래식, 재즈, 록, 팝을 비롯해 일렉트로닉, 앰비언트, 민속 등에 이르는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동시에, 대중 취향의 서정적인 연주에서부터 실험적인 진지함을 담은 곡에 이르기까지, 작곡과 연주를 통해 다양한 음악적 경험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류이치는 음악가이면서도 우리가 직면한 현실에 대해 적극적인 견해를 밝히기도 하는데, 환경과 오염, 반테러 및 반전 등은 물론 핵연료 재처리나 저작권 등과 관련한 민감한 문제에 관해서도 직접적인 소신을 밝히기도 한다. 이러한 류이치의 사회적 의견은 직접적인 활동은 물론 음악적 실천을 통해서도 전달되기도 한다.

 

이번 앨범은 Async (2017) 이후, 몇 편의 영화 음악을 제외하면, 6년 만에 선보이는 류이치의 정규 앨범이다. 전작에서도 암 선고 이후의 일상에 관한 여러 생각과 감정을 음악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번 앨범 역시 전작에서 주로 활용했던 피아노, 신서사이저, 필드 리코딩, 그리고 소소한 이펙터 등을 사용하고 있으며, 담고 있는 내용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감상할 수 있다. 다만 전작의 경우 그 결과에 있어 비교적 완성된 곡에 가까운 형식을 취한다면, 이번 앨범에서는 마치 일상의 스케치와도 같은, 마치 있는 그대로의 감정과 생각을 소리로 적어 내려간 소묘처럼 그려내고 있다. 그만큼 꾸밈없이 진솔하고, 그래서 더 마음을 깊게 울린다.

 

류이치는 수록된 12개의 곡을 ‘일기’에 비유하며, 처음 곡을 녹음한 날을 제목으로 남긴다. 앨범은 20210310에서 시작해 20220404로 이어지는, 약 1년여 간의 기록을 담고 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는 음악가의 감정과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사운드 그 자체에서뿐만 아니라, 연주를 구성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전체적으로는 비교적 미니멀한 구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차츰 소박한 양식을 지닌 형태로 변화한다. 필드 리코딩, 신서사이저, 피아노 등으로 이루어진 소박한 레이어는,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의 악기만으로 연주를 완성하는가 하면, 딜레이를 이용해 지난 흔적을 되세기는 듯한 여운 또한 차츰 긴 서스테인과 리버브만을 남기며 소리의 소멸을 그려가게 된다. 거의 모든 피아노 연주는 투명한 그랜드의 사운드로 재현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먹먹하게 조율된 업라이트가 등장하기도 하고, 신서사이저 역시 단일한 소스를 활용한 투명한 사운드를 보여주는가 하면, 때로는 베이스를 바탕으로 하는 폴리포닉 한 무거운 음색을 통해, 수시로 변화하는 음악가의 복잡한 심경을 묘사하기도 한다. 때로는 힘겨운 숨소리도 고스란히 담기는가 하면, 타건의 미세한 작은 흔들림조차 그대로 보여주는 등, 모든 연주 하나하나가 마치 음악가의 남은 생명을 대가로 완성되었다는 느낌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그리고 앨범의 마지막은 매달린 유리잔들이 깨질 듯 아슬아슬하게 부딪치는 소리만을 남긴 채 끝을 맺는다.

 

2022년 12월 11일, Ryuichi Sakamoto: Playing the Piano 2022 콘서트는 류이치의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1주일 동안 녹음한 라이브로 1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류이치는 “나는 라이브 공연을 할 힘이 남아 있지 않다”면서 “내가 이런 방식으로 연주하는 것을 보는 것은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라는 말로 솔로 콘서트에 대해 마무리했다. 이 음악가에게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허락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만큼은, Happy Birthday, Mr. Sakamoto!

 

 

20230117

 

 

 

related with Ryuichi Sakam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