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o Parisi - (Untitled) (self-released, 2021)
미국에서 활동 중인 이탈리아 전자음악가 Marco Parisi의 데뷔 앨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했고 전문적인 클래식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지는 마르코가 일렉트로닉 계열의 음악을 선보인다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지만, 개인적으로 이번 작업이 흥미로웠던 것은 전체 작업을 오직 Roli사의 Seaboard 하나만으로 완성했다는 점이다. 기존 미디 컨트롤러에서는 단순한 피치밴드 조절만 가능했다면 시보드는 Strike, Glide, Slide, Press, Lift 등의 동작을 통해 현악, 관악, 건반, 타악 등 거의 모든 악기의 동작을 담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상 신서사이저인 Equator나 MPE를 지원하는 VST를 이용해 솔로 연주에서부터 오케스트레이션에 이르는 다양한 표현을 연출할 가능성을 지닌 새로운 개념의 키보드이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뮤지션들이 사용하는 Ableton Live에서조차 최근 버전 업데이트를 통해 MPE 기능을 지원했고, 여전히 메이저 가상 악기 제조사의 플러그-인과의 호환성에 제약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악기가 온전한 성능을 발휘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결국 앨범의 전체 작업을 시보드 하나만으로 제작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제약을 감수한 환경에서 창작이 진행되었다는 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마르코는 앰비언트 계열의 음악들을 선보이며 이와 같은 핸디캡을 우회하고 있으며, 시보드가 지닌 표현의 특징에 집중하여 다양한 텍스쳐의 사운드를 조합한 작업을 보여준다. 시보드의 글라이드 동작을 통해 음과 음 사이의 부드러운 밴드 피칭이나, 슬라이드를 이용해 폴리포닉 한 사운드의 극적 변화는 물론, 하나의 단일한 키에서도 프레스의 섬세한 조율로 미묘한 벨로시티의 증감을 보여주는 등 악기가 지닌 표현의 다양성을 최대한 담아내고 있다. 이는 마치 소리 하나하나에 강한 상징성을 부여해 그 의미가 확장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전달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며, 미니멀한 구성 속에서도 다면성을 지닌 정서적 흐름을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어쿠스틱 계열의 사운드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 공간은 마치 가상적인 무의식과도 같은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어 다분히 몽환적인 앰비언스를 연출하기도 한다. 다양한 계열의 여러 사운드와 텍스쳐를 활용하면서도 나름의 정서적 균일함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악기 자체가 지닌 제한을 장점으로 활용했다는 생각도 든다.
2021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