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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

Blaer - Pure (Ronin Rhythm, 2023)

 

스위스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Maja Nydegger가 이끄는 퀸텟 Blaer의 앨범.

 

2013년 피아니스트 마야를 중심으로 모인 블레어는 지금까지 드럼을 제외하면 안정적인 호흡과 팀-워크를 유지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음악적 색을 서서히 찾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와 같은 변화는 스스로의 내면을 더욱 견고하면서도 아름답게 완성해 가는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클라리넷 Nils Fischer, 색소폰 Claudio von Arx, 베이스 Simon Iten, 드럼 Philippe Ducommun 등과 함께 녹음한 이번 네 번째 앨범은 블레어의 음악이 어떤 심미적 내밀함을 축적해 왔고, 서로에 대한 유대를 강화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블레어의 음악적 콘셉트는 더욱 선명해졌으며, 다양한 유형적 특징들은 하나의 단일한 언어와 표현으로 온전한 통합을 이루고 있어, 이들의 독창성은 그 어느 때보다 명료하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미니멀한 테마를 중심으로 차분한 호흡에 신중한 걸음으로 이어지는 진행은 인상적이다. 집요하다는 인상을 줄 만큼 테마에 대한 강한 집중력을 보여주는데, 제한된 스케일과 노트에서 파생한 라인을 중심으로 진행하는 전개만으로도 풍부한 감성을 재현하고 있으며, 반복적인 패턴의 아르페이지오가 플로우 속에서 안정과 변화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 또한 강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구조화된 공간과 제한된 조건 안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심미적인 탐색은 숨이 막힐 만큼 치밀하면서도 세련되었다. 진행 과정에서 구조가 완성하는 공간의 형상은 큰 변화를 보여주지 않지만, 경직된 고착과는 전혀 무관하며, 나름의 유연성을 통해 섬세한 서정이 서서히 깃들 수 있는 여백을 개방하고 있으며, 그 움직임은 마치 자연에서의 일상적 변화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만큼 구성원들은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편안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도, 서로의 호흡에 본능과도 같은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반응을 더하며 공간의 밀도를 차분하게 채워간다. 이러한 상호 반응은 즉각적인 능동성이라는 표현과는 거리가 멀지만, 농밀하면서도 유기적이고, 무엇보다 차분하면서도 심미적인 화학적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있어, 다른 연주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양식의 인터랙티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로가 상대에 대해 취하는 거리만큼 개별 공간에서의 호흡 또한 섬세하고, 그 사운드 역시 배려가 깊다. 큰 폭의 변화가 없는 듯 보이지만, 흐름 속에서 주법의 변화를 반영한 톤의 움직임은 물론, 사운드 그 자체의 세밀한 조율을 통해, 곡에 새로운 색감을 조심스럽게 더하며, 자신들만의 극적인 구성을 완성하기도 한다. 이는 구성원들 상호 간의 관계에도 혹은 그 관계를 통해서도 반영되어 이들의 차분한 호흡은 역동적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구조화된 공간 내에서의 집요한 탐색이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미적 경험을 인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평온함 속에서도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하며 극적 서정을 아름답게 담아내고 있으며, 상대의 호흡을 자신의 연주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공간을 더욱 다채롭게 완성하고 공유하는 과정 또한 무척 인상적이다. 지적 세련미가 넘치고 섬세한 감성이 깃든 아름다운 앨범이다.

 

 

2023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