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14일, 세상을 떠난 스웨덴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고 Esbjörn Svensson의 솔로 앨범.
1964년 4월 16일, 클래식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와 재즈 애호가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에스비에른은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음악적 경험과 더불어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고, 1980년대 북유럽 재즈 씬에 사이드 맨으로 데뷔한다. 1990년, 어린 시절 친구인 드러머 Magnus Öström과 콤보를 결성해 활동을 이어가던 중, 1993년 베이스 연주자 Dan Berglund가 합류하여 역사적인 Esbjörn Svensson Trio를 결성하게 된다. EST는 에스비에른의 사후에 발매된 앨범을 모두 포함, 11장의 스튜디오 리코딩과 6장의 라이브 녹음을 남겼다. Bill Evans Trio가 현대적인 재즈 트리오의 규범을 완성했고, 그 위에 Keith Jarrett이 트리오를 통해 개별 공간의 자율성을 개방하는 방식을 확립했다면, EST는 이를 바탕으로 그 표현의 경계를 확장하는 시도를 도입하게 된다. 때문에 오늘날에 있어 EST는 마치 하나의 고유한 상징성을 지닌 음악적 개념처럼 여겨지고 있으며, 그 현상의 다양한 이면은 흔히들 Post-EST라고 통칭할 만큼, 에스비에른과 그의 동료들이 남긴 음악적 유산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다.
에스비에른은 EST 외에도 Nils Landgren, Lina Nyberg, Viktoria Tolstoy 등의 뮤지션들과 여러 리코딩을 남겼지만, 지금까지 유일하게 선보이지 않았던 것이 피아노 솔로 녹음이었다. 이번 앨범은 에스비에른이 세상을 떠나기 불과 몇 주 전에 자신의 집에서 리코딩한 것으로, 그의 아내인 Eva가 백업하고 보관했던 녹음을 EST의 엔지니어였던 Åke Linton의 작업을 거쳐 세상에 선보이게 되었다. 이번 앨범은 다양한 행사와 함께 발매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지난 9월에는 Sven-Harrys 미술관에서 콘서트가 진행되었고, 출반에 맞춰 레이블에서 주최하는 온라인 행사와 더불어, 이후에는 단편 영상 공개 및 출판도 이어질 것으로 예정되어 있다.
사실상 EST가 아닌 에스비에른 개인의 음악적 창의를 보여주는 유일한 텍스트인 이번 앨범은, 홈 리코딩이라는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하나의 온전한 음악적 가치를 지닌 완성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단순한 아이디어의 나열이나 불완전한 구조를 지닌 스케치가 아닌, 에스비에른의 음악적 세계관을 요약하는 음악적 문장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지금까지는 트리오라는 공간적인 기능과 역할 속에서 드러났던 에스비에른의 연주를 접했다면, 이번 앨범을 통해 우리는 피아니스트며 임프로바이저이자 작곡가이면서 충만한 상상력을 지닌 한 인물의 봉인된 작업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피아니스트 에스비에른의 연주는 과감함과 섬세함이 공존한다. 행간에 숨겨진 심미적 표현이 전하는 깊이는 놀랍고 여전히 신선하다. 균일한 벨로시티로 풍부한 음계를 활용해 화려한 타건을 이어가면서도 그 안에 본능에 가까운 독특한 그루브를 연출하는가 하면, 음과 음 사이에 남겨진 여백 사이에 서서히 풍부한 정서적 잔향으로 채워가는 깊은 감수성도 함께하고 있다. 블루스, 클래식, 민속, 록 등의 다양한 음악적 연대기를 떠오르게 하는 주법들은 물론, 때로는 선배 거장들의 표현을 연상하게 하는 표현 등을 유기적으로 조합하여 다면성을 지닌 프레이즈로 완성하는 방식은 유연하면서도 아름답다. 가끔은 스스로 주체하지 못할 만큼 무수히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는 다양한 음악적 아이디어를 자신의 손끝에 모아 정리하고, 하나의 연주 안에 이를 통합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피아니스트의 창의적인 음악적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장르 복합적이라는 인상은 전혀 없고, 오히려 그 자체가 하나의 단일한 음악적 언어에 기초해 완성된 표현이라는 느낌이 강한데, 어쩌면 이는 에스비에른의 음악과 연주가 지닌 고유한 특징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의 천재성이 이룬 통합적 사고의 집약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다양한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하나의 통합된 표현으로 집약하는 과정 그 자체가 임프로바이징이라는 점은 무척 인상적이다. 이것이 14년 전의 음악적 아이디어라는 사실을 전혀 실감할 수 없을 만큼 오늘날의 연주와 비교해도, 풍부하고 번뜩이는 발상들로 가득하며, 어떤 면에서는 누구도 쉽게 연출하기 힘들 만큼 모던하기까지 하다.
한 시대를 상징했던 수많은 뮤지션들이 세상의 무대에서 퇴장하는 여러 순간을 마주하면서도, 유독 에스비에른과의 이별에 그토록 많은 아쉬움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보다 들려줄 이야기가 더 많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당시에도 그의 음악적 상상력과 기량은 절정을 향해 나가고 있었다는 점을 이번 앨범이 보여주고 있어, 에스비에른의 갑작스러운 사고는 더욱 아쉬울 수밖에 없다. 14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의 음악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라는 점을 이번 솔로 앨범이 증명하고 있다.
202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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