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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

Evgueni Galperine - Theory of Becoming (ECM, 2022)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뿌리를 둔 프랑스 작곡가 Evgueni Galperine의 앨범.

 

구 소비에트 연방 시절 첼랴빈스크에서 태어난 예브게니는 우크라이나 출신 작곡가인 아버지 Youli Galperine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전문적인 음악교육과 더불어 다양한 음악적 소양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6세이던 1990년에 파리로 이주하여 작곡가 전자 음향을 전공했고 2000년대부터 공연과 광고 등을 위한 음악을 작곡하며 본격적인 음악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솔로 뮤지션으로서의 활동과 더불어 동생인 Sacha Galperine과 공동으로 여러 편의 영화에도 기여하게 되는데, 미국의 대중적인 취향의 작품에서부터 유럽의 예술 영화는 물론 TV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예브게니의 사운드트랙은 비교적 폭넓은 장르의 영상 속에서 활용되기도 했다.

 

예브게니의 음악은 자신의 민족적 뿌리인 슬라브적인 전통을 고전적인 양식을 통해 수용하는 동시에 현대 클래식의 영향력을 직접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와 같은 복합적인 특징은 영화적인 내러티브 속에 융해되며 예브게니 특유의 양식으로 자리하게 된다. 여기에 전자음향과 그 효과를 활용한 작법은 VST를 이용해 사운드를 배열하는 영화음악에서의 단순한 기능적인 접근 방식과는 달리, 개별 레이어 하나하나가 고유한 음악적 시퀀스처럼 기능하도록 배려한 섬세한 큐레이팅이 눈에 띄며, 덕분에 순수한 일렉트로닉으로 완성된 연주조차 전통적인 실내악이나 오케스트레이션을 연상하게 하는 복합적인 다면성을 지니기도 한다. 영상 속 그의 음악이 때로는 스코어 그 자체가 독립된 역할로 기능하는 모습도 종종 존재하지만, 개별 라인이 지닌 강한 상징성 덕분에 등장인물들 각각의 내면은 물론, 배경이나 상황과의 관계에 대한 묘사로 연결되어 묘한 매력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예브게니는 러시아 영화감독 Andrey Zvyagintsev로부터 Loveless (2017)를 위한 작곡을 의뢰받게 되는데, 대본을 읽거나 촬영물을 관람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로지 작곡가의 관점에서 음악을 만들어달라는 요구를 수용하며, 이와는 별도로 현대 작곡에 기반하는 작곡가의 개인 작업을 동시에 구상하게 된다. 이번 앨범에는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하며 개인적으로 꿈꿔왔던 ‘순수한 음악’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으며, 자신의 아버지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우크라이나의 현재 상황에 대한 심경도 포함하고 있어, 한편에서는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 공감을 담아낼 수 있는 작업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는 기존 예브게니가 영화 관련 작업을 통해 선보였던 작업을 폭넓게 활용하는 집약적인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이번 작업에서는 인상주의에서부터 미니멀리즘에 이르는 고전적인 양식을 현대 작곡의 언어로 수용하는 예브게니 특유의 포괄적인 방식에서부터 어쿠스틱과 일렉트로닉의 관계에 대한 작곡가의 독특한 접근을 함께 포착하는 복합적인 다면성을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모습은 개별적인 구체성을 통해 드러나기도 하며, 때로는 여러 특징을 통합하는 듯한 복합적인 공간 속에서 사운드를 배열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여기에 기존 영상 작업의 영향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고유한 내러티브를 이용한 전개를 통해 극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진행은, 다면적인 특징을 지닌 구성을 비교적 긴장감 있게 전달하는 핵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와 같은 극적 구성이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것은 전쟁과 파괴를 암시하는 대목은 물론, 희망과 평화를 암시하는 이미지너리 한 순간들도 해당한다.

 

이번 앨범에서 인상적인 것은 어쿠스틱과 일렉트로닉의 관계에 대한 예브게니의 유연한 창의성이다. 개별 사운드가 지닌 특징과 고유의 상징성을 고스란히 살리면서도, 연주 악기와 VST의 경계 자체에 대한 구분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듯한 태도는 물론, 보이스 Masha Vasyukova, 트럼펫 Sergei Nakariakov, 첼로 Sebastien Hurtaud 등의 연주를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이를 샘플링하여 새로운 기악적 요소로 활용하는 등의 모습은 일렉트로어쿠스틱의 창의적인 일면을 대하는 듯하다. 샘플링된 연주를 악기 고유의 표현을 넘어선 음역대로 확장하거나, 시퀀싱을 통해 연출한 듯한 루프나 비트의 연속으로 배열되는가 하면, 악기의 독특한 메커니컬 사운드를 활용해 퍼커시브 한 음향으로 연출하는 등, 현실적인 기악적 발성을 이용한 창의는 익숙함과 낯섦 사이의 묘한 긴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특히 연주 악기와 전자 악기 사이의 긴장 대신 고유의 소리들이 서로 대질하는 방식에서 기원하는 복합적인 유형의 텐션은, 개별 사운드가 지닌 상징성은 물론 내러티브의 플로우와 맞물리며, 그 자체로 곡의 인상을 규정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여, 그 관계와 변화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몰입을 제공한다.


현대 고전 내의 여러 음악적 경계에 대한 깊은 인식과 사고를 반영하면서도, 이를 하나의 언어로 통합하는 대신 각각의 특징에 대한 유연한 접근을 통해 집약적인 표현으로 완성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현대 작곡의 경향적 특징들을 폭넓게 포괄하면서도 예브게니 고유의 유니크 한 면모까지 감상할 수 있는 흥미로운 앨범이다.

 

 

2022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