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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

Flexagon - The Towers I: Inaccessible (Disco Gecko, 2023)

 

영국 건지섬을 기반으로 활동 중인 전자음악가 겸 작곡가 Flexagon의 앨범.

 

2010년대 중반부터 활동을 시작한 플렉사곤은 DJ, 프로듀서, 사운드 아티스트, 엔지니어 등 폭넓은 분야에서 활동을 이어오고 있으며, 그의 음악 또한 하우스, 테크노, 사이트랜스는 물론 엠비언트와 칠 아웃에 이르기까지 일렉트로닉의 폭넓은 양식을 다루고 있다. 최근 그의 음악은 미니멀한 양식의 앰비언트와 다운템포를 바탕에 둔 실험적인 형식을 선보이는가 하면, 전통적인 연주 악기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접근을 모색하는 작품도 제안하는 등, 자신의 음악적 세계관을 더욱 확장하려는 일련의 노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변화의 계기를 상징하는 앨범이 7 Nocturnes East (2020)가 아닐까 싶은데, 자신의 고향 건지섬의 여러 동부 해안을 이른 새벽부터 다니며 채집한 필드 리코딩을 이용해 장소의 고유한 분위기를 음악적 캔버스에 담아내는 작업을 선보이게 된다. 플렉사곤이 장소성에 주목한다는 것은, 어쩌면 역사성에 관심을 두게 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영국 왕실의 종속 지역으로 대외적으로는 영국의 관리하에 있지만, 헌법상 자치권을 지닌 영토이며, 지정학적인 요인으로 두 차례의 세계 대전 당시에는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되어, 영국과 독일 양측으로부터 큰 희생을 치르기도 했고, 그 상흔은 냉전 시대에도 이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의 흔적은 섬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으로 전해지며, 플렉사곤은 이 장소에 버려진 상징적 건축물들을 찾아가, 장소성과 역사성을 음악적으로 복원하는 일련의 작업을 예고하게 된다.

 

이번 앨범은 총 3부작으로 예정된 해당 작업 중 첫 번째에 해당한다. 앨범의 각 트랙 제목은 관측탑, 시계탑, 풍차, 통신탑, 저수탑 등과 같이, 현재 남아 있는 2차 대전 및 냉전 시대의 구조물이며, 이곳에서 현장 녹음 등과 같은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이 장소들은 일반인들에게는 여전히, 앨범의 부제처럼 ‘출입금지’라고 한다. 개별 곡들은 저마다 고유한 특징을 지니고 있어, 각각의 장소가 담고 있는 시간의 흐름과 그 균열을 나름의 구체적 표현을 통해 묘사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장소가 지닌 특징을 드러내는 듯한 상징적인 사운드는, 사건이나 시간을 은유적으로 담아낸 듯한 다른 요소와 대질하며, 그 자체로 하나의 독특한 음향적 공간을 완성하는 방식을 취한다. 서로 상이한 성격을 지닌 여러 유형의 소스들이 중첩을 이루며 완성하는 플로우는, 일련의 구성적 양식을 지닌 아키텍처이자, 동시에 내러티브와도 같은 이중적인 인상을 보여주고 있어 무척 흥미롭다.

 

이와 같은 구체성을 완성하기 위해 플렉사곤은 신서사이저의 전자 음향 외에도 필드 리코딩, 샘플링을 비롯해 첼로, 잉글리시 호른과 같은 연주 악기는 물론 전통적인 현지 언어를 담은 내레이션 등 다양한 음원을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플렉시곤은 이질적인 특징을 지닌 소스들을 서로 대질시켜 독특한 공간적 표현을 연출하는데, 어쿠스틱 계열의 사운드를 디지털의 텍스쳐와 중첩하여 미묘하게 서로에 부유하는 듯한 모습으로 담아내는가 하면, 드럼 비트와 스텝 시퀀싱의 직접적인 대질은 물론, 필드 리코딩과 사운드스케이프의 점층을 지난한 흐름으로 엮어내기도 한다. 그 자체로 일종의 낯섦을 묘사하는 듯하면서, 동시에 공간과 시간이 얽히는 과정의 험난함을 표현하는 인상을 주고 있어, 한편에서는 작가의 생각을 대면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에서는 긴밀한 유기성을 강조하고 있다. 필드 리코딩의 반복적 흐름에서 파생한 듯한 시퀀싱 패턴이나, 묘사적 표현을 담은 현장 음원을 신서사이저로 추상한 듯한 사운드스케이프로 확장하는 등, 일련의 대질은 긴밀한 유기성을 바탕에 두는 치밀함을 담고 있다. 미세한 피치 밴딩으로 사운드 플로우에 굴곡을 일으키거나, 섬세한 텍스쳐와 노이즈 필드를 활용해 균열을 암시하는 등, 다양한 긴장의 요소를 담고 있어, 다양한 사고의 가능성을 열어 놓은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다양하고 사운드와 소스를 복합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각각의 곡은 앰비언트, IDM, 하우스, 테크노 등, 저마다의 고유한 분위기를 간직하면서도, 기승전결을 이루는 방식이나, 그 과정에서 페이드 인-아웃을 통해 구성하는 레이어링의 운영과 플로우 등은 규범적인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어, 나름의 작가적 관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앨범은 다양한 소스들을 다루면서도 곡 전체가 이루는 공간의 밀도는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있으며, 여러 장르적 표현 속에서도 앨범은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듯한 흐름을 담고 있어, 이 여정을 따라가는 모든 순간은 다채롭고 흥미로움이 가득한 과정을 제공한다. 세련미를 바탕에 두고 감각적 표현을 절제된 방식으로 표출하고 있어, 그 분위기는 무척 고급스럽고 지적이다. 더불어 사운드 그 자체가 주는 쾌감도 인상적인 앨범이다.

 

 

2023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