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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til Bjørnstad & Anneli Drecker - A Suite of Poems (ECM, 2018)


노르웨이 출신 피아니스트 케틸 비에른스타와 가수 겸 배우 아넬리 드렉커의 듀엣 앨범. ECM에서는 A Passion for John Donne (2014) 이후 4년 만에 선보이는 신보로, 이번 앨범에서 케틸은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작가 겸 시인인 Lars Saabye Christensen의 시에 곡을 붙여 녹음한다. 1970년대부터 여러 편의 작품을 집필한 문학 작가이기도 한 케틸에게 있어 이러한 유형의 작업은 익숙한 것으로, 시와 문학을 대상으로 한 앨범은 여럿 존재한다. 2014년 ECM 전작 외에도 The Light (2008)에서도 16, 7세기 영국 시인 존 던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에드바르 뭉크의 작품과 글을 다룬 Sunrise (2013) 등도 문학 텍스트에 기반을 둔 케틸의 음악 작업으로 손꼽힌다. 이번에 케틸이 다루고 있는 것은 'Hotel Poems'라고 이름 붙인, 라르스가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케틸에게 보낸 시들이다. 이번 앨범에서 라르스의 시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인 탓에 보컬인 아넬리의 중심적 역할이 자연스럽게 강조되고 있다. 피아노-보컬의 관계를 형식적으로 보면 듀엣이라기보다 일상적인 반주자와 가수처럼 보인다. 실제로 마지막 트랙에서의 온전한 케틸의 솔로 연주를 제외하면 피아니스트의 독립 혹은 개별 공간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아넬리의 곡 중간 피아노 솔로의 계기조차 피아니스트는 적극적인 임프로바이징을 구사하지 않고 흔한 단조로운 간주처럼 단순하게 흘려보낸다. 이처럼 케틸은 아넬리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한함으로써 라르스의 메시지에 청자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의도한다. 아넬리 역시 그 의도에 충실한 모습이다. 보컬의 기교보다 정학한 딕션을 통해 메시지가 명료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호흡과 리듬을 자연스럽게 이어간다. 실제로 가사 전달력은 뛰어나고, 멜로디에 얹혔다기보다 마치 호흡에 맞춰 이야기하듯 던지는 발성은 시적 전달에 최적화된 형식처럼 들린다. 여행 중에 시인이 느꼈을, 때로는 외롭고 실존적일 수 있는 감정을 작곡가와 가수는 뛰어난 공감 능력을 발휘해 음악으로 완성한다. 음악으로 감상하는 시집인 셈이다.

2018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