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Thomas Enger의 솔로 앨범.
토마스의 본업은 저널리스트로 오랜 기간 언론 업계에 종사했고, 2010년 이후에는 전업 작가로 활동하며 지금까지 출판한 6편의 책은 세계 각국에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상을 여러 차례 받는 등, 나름의 성공적인 창작 성과를 보여준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그가 음악을 직접 만들기로 결심한 계기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지만, 2010년대 말부터 몇 편의 짧은 영상과 함께 직접 작곡하고 연주한 일련의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했으며, Pure & Simple, Vol. 1 (2020)이라는 앨범을 자주발매 형식으로 출반하면서 음악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게 된다. 이후 간헐적으로 선보인 그의 음악은 나름의 시선을 끌게 되는데, 최근에는 Nils Frahm이 직접 편집한 Piano Day, Vol. 1 (2022) 공식 앨범에도 토마스의 연주가 수록되는 등의 일들만 보더라도, 이러한 관심은 단순히 작가로서의 인지도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번 앨범을 포함해 토마스가 들려주는 음악이, 지금까지 그가 집필을 통해 전달했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상반된 정서적 반영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책들이 범죄 혹은 스릴러 장르와 관련되어 있다면, 음악은 사적 정서 혹은 주변을 둘러싼 감정적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소박한 피아노 연주를 통해 전달하는 음악은 오늘날의 모던 클래시컬의 경향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 범주에서 다뤄질 수 있는 다양한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다. 특히 북유럽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와 인간의 따듯한 내면을 다루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에서 나름의 고유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음악가로서 토마스가 지닌 감성을 엿볼 수도 있다.
토마스의 피아노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은 소박하면서도 명료한 표현에 있다. 특히 그의 타건은 무척 은유적이고 함축적이어서, 화려함으로 장식하는 다른 연주자와는 다른 토마스 특유의 차분한 스타일을 들려주는데, 때로는 인상주의적인 형상으로 전해지는 그의 연주는 여백 속에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음과 음, 혹은 소리와 소리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여백에 의미를 담아내고,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정서적 표현을 구체화하는 방식 역시 무척 간결하다. 피아노의 서스테인만으로 채우기에는 부족할 수밖에 없는 여백에 세밀한 일렉트로닉을 활용해 정서적 밀도를 채워가는데, 새로운 레이어를 점층한다는 느낌보다는, 어쿠스틱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리버브의 테일에 섬세하게 이어지는 일렉트로닉의 배음, 연주의 배경에 실안개처럼 은은하게 깔리는 사운드 베드 등, 전자 음향이 피아노의 기본적인 플로우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 모습은 다분히 기능적이라는 인상을 주면서도, 이를 배제한 순수한 어쿠스틱 공간만으로는 현재와 같은 깊이 있는 감성적 전달은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매력은 토마스가 전하는 음악적인 메시지에 있다. 차갑고 투명한 리버브를 이용해 연출하는 추운 냉기와 대비를 이루는 따듯한 음악적 내용은, 마치 얼어버린 땅 위에 작은 불씨를 살려 놓은 듯한 정서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는 각 곡의 제목을 통해서도 드러나는데, 마치 내 옆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모습처럼 전달되는 것은, 토마스 특유의 연주 스타일과도 관련 있음은 분명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들려주기보다는, 내 마음속 공감에 도달하려는 듯한 세심한 표현은 진솔하면서도 솔직한 느낌으로 전달되고 있어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일렉트로닉이나 코러스 등과 같은 레이어의 활용에서 보여준 세밀함은, 토마스의 이야기를 특별한 과장 없이 전달한다는 인상을 전하며, 그 안에 듣는 사람의 감정을 비춰볼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해주는 듯하여, 자연스러운 감정적 몰입을 가능하게 한다.
은유적이고 함축적인 연주 스타일에 비해 토마스의 음악적 메시는 무척 진솔하면서도 명료하다. 이는 앨범의 타이틀뿐만 아니라 개별 곡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는데, 구체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내면의 정서적 반영을 솔직하게 옮겨 놓은 듯한 연주는, 그 어떠한 꾸밈이나 과장 없이도, 뚜렷하게 전해진다. 이와 같은 시적 진솔함이 토마스의 음악에 귀 기울이게 하는 이유임을 잘 보여주는 앨범이다.
2022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