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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 Jaeil - Listen (Decca, 2023)

 

한국 작곡가 정재일의 피아노 연주를 담은 Decca 데뷔 앨범.

 

정재일은 1990년대 말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해 20년 넘은 경력을 보유한 연주자이자, 싱서송라이터이자,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이다. 정재일은 스스로에 대해 “무대 뒤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평가했고, 2000년대 초 가수로 직접 데뷔한 경험과 몇 편의 개인 작업을 제외하면 실제 그의 모든 활동은 대중과 직접적인 접점이 존재하지 않은 “무대 뒤”에 머물렀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그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무대 뒤”에서 담당했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2019)과 황동혁 감독의 Netflix 시리즈 ‘오징어 게임’ (2021)을 통해서였고, 이제 우리는 다양한 음악적 뿌리에 기원을 둔 정재일의 음악 세계와 직접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정재일은 2010년대 이후에 몇 편의 개인 작업을 선보인 적이 있는데, Incendies (2012), 상림 (2014), 8 Days (2014), 끝내 바다에 (2017), 사군자, 생의 계절 (2020) 등을 들어보더라도, 그가 민속, 클래식, 재즈, 앰비언트 등의 폭넓은 장르적 표현을 소화하면서도, 이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정리해 하나의 음악적 공간 안에서 재현할 수 있는 뮤지션인지 충분히 직감할 수 있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몇 편의 OST만 하더라도 다양한 악기를 통해 재현한 독특한 사운드와 어우러진 그의 음악 세계는 폭넓은 표현을 담으면서, 동시에 주제의 핵심을 꿰뚫는 깊이 있는 음악적 사고를 드러낸다. 영화와 드라마의 성공 이후, 최근에 선보인 psalms (2020)는 작곡가의 모든 표현과 세계관을, 마치 하나의 언어로 압축한 듯한 놀라운 경건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종교적 모티브를 사용하여 시대의 아픔을 녹여냈고, 클래식적인 함축을 통해 현대적인 양식의 작곡을 담아내고 있다.

 

이번 앨범은 전작에 비해 조금은 사적인 영역에서 다뤄질 수 있는 내용을, 피아노를 중심으로 담아내고 있다. 정재일 스스로 “가장 편한 언어”로 시작하고자 자신에게는 “모국어나 다름없는” 피아노를 선택했고, 단일 악기를 중심으로 진행하는 소박한 편성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안에 담긴 음악가의 이야기는 더 진솔하고 깊은 울림에 도달한다. 자신을 둘러싼 주변에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인 피아노”로 전하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음악을 듣는 우리 또한 자연과 인간 등 주위의 모든 것들의 목소리를 들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담아 앨범 제목을 Listen으로 정했다고 한다.

 

앨범이 수록하고 있는 7개의 트랙 중 마지막을 제외한 전 곡은 정재일 자신의 피아노 연주로 이루어진 단출한 편성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간결함에도 그의 연주는 통상적인 피아노 녹음 및 재현 방식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적막한 스튜디오 홀 내부의 투명한 공기를 채우는 기존 방식과는 달리, 악기 현의 울림이 만드는 진동을 서스테인의 얇은 음선 표면에 미세한 텍스쳐처럼 흩뿌려 합착한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독특한 질감을 지닌 이러한 서스테인은 쉽게 소멸하지 않고 다른 음향과 중첩을 이루며 독특한 배음을 완성하기도 한다. 이러한 효과는 연주 주변을 중심으로 점차 점도를 더하는가 하면, 마치 공기 자체를 하나의 드론처럼 만들어버리는 독특한 배음을 연출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들어왔던 피아노 독주와는 전혀 새로운 공간 표현이며, 이는 피아니스트 자신의 연주가 자신에게 다시 되돌아와 반향과 중첩을 만들어 이미지를 더욱 밀도 있게 완성하는 듯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나의 음을 마디 간격으로 반복해서 타건해도, 그 울림이 전해지는 위상이 매번 바뀌면서, 간결한 연주조차 입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하는데, 단순한 스테레오 이미지를 벗어난 공간의 재구성은 연주를 해치지 않고, 오히려 듣는 이에게 그 내면의 메시지에 정확하게 도달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듯한 모습처럼 들리기도 한다. 녹음은 과거 ECM의 수많은 명반을 완성한 노르웨이 Rainbow Studio에서 이루어졌다.

 

E - Emaj7 - C#m으로 이어지는 간결한 코드와 단순한 멜로디만으로도 귀를 압도하는 도입이며, 10개의 손가락 모두를 이용한 코드와 화성의 진행만으로도 라인을 완성하는 뛰어난 음악적 표현은, 누가 들어도 쉽게 공감할 수 있으며, 반복해서 들을수록 새로움을 발견하게 되는 깊이도 함께 담고 있다. 마지막 트랙 스트링 버전은 '옥자’ (2017) OST 시절부터 '기생충’과 최근의 psalms에서도 함께한 Budapest Scoring Orchestra와의 협연으로 완성했다. “무대 뒤에서” 작업했던 한 사람의 음악인이 “무대 위 중앙에서” 들려주는, 그 어떠한 수사나 수식도 필요 없는, ‘듣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음악 그 자체를 담고 있는 앨범이다.

 

 

2023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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