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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

Last Days - Windscale (n5MD, 2023)

 

Last Days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인 영국 전자음악가 Graham Richardson의 앨범.

 

그레이엄은 어린 시절 비정규적인 음학 활동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그래픽 디자인으로 방향을 바꾼 것으로 전해진다. 2006년 n5MD 레이블을 통해 첫 데뷔 앨범을 발표했고, 그 인연은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LD의 음악은 보다 정교한 형식적 틀을 구축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주변 일상에 자신의 사적 정서를 반영한 작품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으며, 가상 악기나 디지털 장비를 이용한 작업임에도 사운드의 균형을 통해 어쿠스틱과 일렉트로닉의 경계를 미묘하게 흔들기도 한다. 앰비언트의 기본적인 특징 속에 현악과 피아노를 이용해 모던 클래시컬 계열의 요소는 물론, 때로는 포스트-록적인 분위기를 더해 독특한 정서적 분위기 연출하기도 한다.

 

이번 앨범은 LD의 기본적인 음악적 특징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어쩌면 지금까지 다뤘던 것과는 다른 주제를 포함하고 있어, 기존의 양식과는 일정한 차별점이 보이는 듯하다. 사적 경험이나 역사 속 개인 등과 같은 소박한 테마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고 이를 음악적 표현으로 완성한 기존 작업과는 달리, 이번 앨범에서는 1957년 윈드스캐일 원자력 사고를 다루고 있다. 무상 전기 공급을 명목으로 건설된 원자로는 핵무기용 플루토늄 생산이 주목적이었으며, 노심 과열로 발생한 화재로 영국과 유럽 전역에 방사성 물질이 방출되었고, 재앙으로 인해 수백만 명의 암환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청 된다.

 

이와 같은 주제는 LD가 지금까지 보여준 스토리텔링의 힘을 크게 부각하고 있으며, 개별 테마를 구성하는 방식에서의 음악적 디테일을 잘 보여주고 있다. 13개의 트랙은 역사적 비극의 진행과 핵심 사건을 요약하고 있으며, 각 제목의 순서 또한 드라마 Chernobyl (2019)을 떠올리게 할 만큼, 사고의 흐름을 생생하게 기록하는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어, 마치 영화와도 같은 구성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앨범 전체가 하나의 서사를 이루고 있으며, 동시에 개별 곡 또한 저마다의 고유한 내러티브를 완성한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각 트랙은 그 성격에 알맞은 서사와 묘사가 적절한 균형과 배분을 이루며 고유한 특징을 담아내고 있다. 묘사를 강조한 곡의 경우에도, 특정한 사건을 연상할 수 있는 상징적인 사운드를 이용해 그 진행 과정을 서술하는 듯한 상세한 디테일을 더해가며 음악적 흐름을 완성하고 있다. 곡의 테마 자체는 미니멀하지만 플로우 속에서 다양한 사운드와 라인의 중첩을 통해 보다 복합적인 다면성을 드러내며 진화하는 양식을 취하고 있어, 지금까지 LD가 보여준 음악적 접근과 비교하면, 플로우의 구성에서 극적 요소들을 한층 강조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구조화된 빌드-업의 양식도 관찰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활용하는 다양한 표현 또한 때로는 감각적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어쿠스틱은 물론 일렉트로닉 계열의 다양한 소스의 사운드를 이용하고 있으며, 저마다의 고유한 톤과 텍스쳐를 강하게 부각하며, 서로의 대칭점에 있는 텐션의 모티브를 극적으로 활용하는 섬세함도 지니고 있다. 어쩌면 이와 같은 디테일이 음악을 더욱 설득력 있게 몰입할 수 있는 요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개별 곡마다 고유한 특징을 담고 있지만, 앨범 전체가 전하는 우울감은, 어쩌면 기존 LD의 작업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정서와 일치한다. 이전 작업들에 비해 조금은 거대해 보일 수 있는 이번 앨범의 테마이지만, 자신의 고향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발생했던 비극으로, 사적 감정을 담아낼만한 충분한 정서적 거리에 있었기에, 이 안에서도 LD의 음악적 일관성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하게 된다. 영상이 없이도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한, 음악적 내러티브의 강한 힘을 느낄 수 있는 앨범이다.

 

 

2023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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