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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

Roger Eno - The Turning Year: Rarities (Deutsche Grammophon, 2023)

 

영국 작곡가 Roger Eno의 앨범.

 

로저의 음악은 그의 형 Brian Eno가 그랬던 것처럼, 전자 음악과 깊은 연관이 있고 실제 그 시작점 또한 이에 기반하고 있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며 숙성한 그의 작업들을 되돌아보면, 현대 장르의 다양한 경향과 특징을 종합하고 이를 자신만의 언어로 담아내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렉트로닉과 앰비언트 외에도 록, 미니멀리즘, 클래식 등의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인 융합을 이루며, 각각의 작업마다 고유한 특징을 드러냈으며, 개인 작품 외에도 영화와 무대를 위한 여러 작곡을 통해서도 로저의 음악이 지닌 폭넓은 세계관을 짐작할 수 있다.

 

최근 형 브라이언과 공동으로 발표한 Mixing Colours (2020)를 포함해, 로저의 Deutsche Grammophon 솔로 데뷔작인 The Turning Year (2022)는 마치 가장 단출한 언어로 지나온 음악적 궤적을 요약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특히 로저의 솔로 전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금까지 수많은 작업들 속에서의 선보였던 다양한 경향적 특징을 하나의 일관된 정서로 집약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각각의 고유한 특징을 지닌 짧은 단편들의 연속 속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이어주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보여주고, 세월을 녹여낸 듯한 음악의 정서적 질감은, 현재를 통해 그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듯했으며, 변화 속에서도 단절 없이 이어진 한 음악가의 삶을 목가적인 분위기를 통해 반영하는 듯했다.

 

이번 앨범은 전작의 확장을 다루고 있다. 이번 작업을 위한 새로운 편곡은 물론, 전작에서 다루지 못했던 트랙을 포함하고 있다. 전작에도 함께 했던 Schering Berlin과의 협연을 포함해, 앙상블의 단원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Rosie Toll과의 공동 작업도 수록하고 있으며, 로저의 두 딸인 Cecily & Lotti Eno와의 협업도 감상할 수 있다. 이번 작업 역시 프로듀서 Christian Badzura가 함께하고 있으며, 일부 트랙에서 직접 녹음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처럼 이번 앨범은 전작과의 차별성보다는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분위기 또한 이전 작업의 연장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앨범은 로저의 솔로, 앙상블과의 협연, 그리고 “Bells”의 두 가지 버전을 다루고 있다. “Bells”의 경우 전작에서는 펠트 한 톤에 간결한 호흡으로 연주한 반면, 이번 앨범에서는 그랜드를 이용해 투명한 사운드로 보다 섬세한 뉘앙스를 담아내고 있으며, 두 딸과 함께 녹음한 버전은 가사와 정교한 화음을 통해 그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재현하기도 한다. 전작의 타이틀 곡이자 이번 앨범의 주요 테마이기도 한 “The Turning Year”는, 이전 연주에서 현악의 레이어와 배음을 활용했던 반면, 이번 녹음에서는 피아노만을 이용한 간결한 구성 속에서도, 그 의미와 깊이를 온전하게 전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번 앨범에는 새로운 작곡 “Moving Chords”를 피아노 솔로로 감상할 수 있는데, 깊고 고요한 리버브 속에 코드 진행만으로 전해지는 아련함은 그 어떠한 화려한 음악적 수사보다 깊은 여운을 남긴다. SB와의 협연은 모던 클래시컬의 공간적 구성을 활용한 실내악적 양식에 기반하면서도 전자 음향의 세밀한 개입을 통해 앰비언트적인 특성도 동시에 구현하고 있다. 특히 전작에서 실내악적 구성에 기반해 재현한 “Slow Motion”의 경우, 이번 앨범에서는 3부작으로 재구성하여 각기 다른 대위적 접근과 인과적 연관을 통해 원곡을 확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최근 로저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을 풍경과 그곳에서의 경험을 글을 통해 이야기하며, 여전히 고향 인근 작은 시골에서 생활을 지속한다는 근황도 덧붙였다. 어린 시절 목가적 경험이 그의 음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또 그 일상적 환경이 그의 작업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이번 앨범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짧게 빛나는 ‘희소한’ 순간을 소리로 엮어 음악을 만들었지만, 이와 같은 특별함은 늘 우리 곁에 함께 하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듯한 앨범이다.

 

 

2023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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